<날적이>
*학담평석, 아함경 독서노트 6/16
슬슬 종강이 다가오고,
여유가 생겨 다시 독서노트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방학에 집중해서 읽었던 아비달마 논장들에 염증을 느껴
이번 방학에는 학담스님 해설하신 아함경을 다시 읽고자 펼쳤습니다.
때때로 독서노트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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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함에 대한 거부감
보이지 않는 진리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모르는 것에 대한 의심_
“불교가 취향이고, 취미가 수행.”
요즈음의 MZ불교를 의식하며 내가 포교 일선에서 염두하고 있는 문장이다.
오늘 하루 계속 고민했던 것이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신성한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까?
‘종교적이다’라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맥락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들이 보고, 듣고, 겪었을 종교인들의 위선이나 비도덕적인 행위,
그에 따른 실망의 경험을 차치하고,
그 거부감 너머에 있는 어떤 감각, 혹은 세계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종교(宗敎)라고 했을 때, 불교에서 ‘교(敎)’는 진리의 길을 드러내는 언어이고,
‘종(宗)’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불교에서 '종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해탈의 실천에 나아가는 삶을 뜻한다.
서구의 "Religion"과는 사뭇 다르다.
절대신에 대한 믿음이 아닌, 연기에 대한 통찰과 실천,
이해와 체험, 관계와 조건의 사유가 중심이다.
그런데 절대신성을 부정하고 출발한 불교조차도
붓다의 열반 이후에는 점차 신성을 둘러싼 신학적 변용을 겪게 된다.
붓다를 우러르는 신앙, 절대자의 언어로 형상화되는 존재들,
그리고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법신불, 비로자나불까지.
붓다는 절대신성을 부정하였지만,
열반 이후 전개되는 ‘불신’에 대한 해석이 변모하며,
그 스스로 절대적인 신성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불교가 말하는 ‘신성’은 신적 존재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세계의 실상에 대한 통찰로서의 신성이다.
대승경전 속 붓다의 몸은
어디 먼 초월의 세계에 있는 형상이 아니라,
세계의 실상 자체, 즉 지혜로 드러난다.
진리로서의 붓다의 몸도,
세간법의 진실이 곧 여래의 진실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역사 속의 붓다와
초월적 신성으로 추대된 붓다가
서로 유리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연기’를 깊이 이해하면 둘은 하나다.
사제십이연기의 교설 밖에 화엄이 따로 있지 않고,
화엄이 말하는 일심법계 밖에 역사 속 붓다가 따로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연기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거룩한 대상의 신성함도, 보이지 않는 진리도,
내가 모르는 사실들도 또한 연기의 바탕에 있다는 이해.
‘나’ 이외의 세상이 아니며, 세상 이외의 ‘내’가 아니라는 것.
역사 속 인간은
‘거룩한 대상’을 우러르고 그에 의지함으로써
삶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런데 뭐, 어디 ‘거룩한 대상’만이랴.
거룩하지 않은 것 또한 그러한 대상이 되곤 한다.
그게 신이든, 철학이든, 어떤 사상이나 취향이든.
인간은, 거룩한 것이든 거룩하지 않은 것이든,
무엇이든 하나 붙잡고 도취된 채
그로써 삶의 불안과 공포(요즘 말로 ‘존재통’ 정도로 이해되는)를
잊고 싶어한다.
그러나 때로 그러한 도취가,
이미 연기의 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연기를 자각하려는 시도를 훼방한다.
거룩한 대상의 신성함과,
보이지 않는 진리와,
내가 모르는 사실들 또한
연기의 바탕에 있다는 바른 이해를 갖는 것조차도
훼방하고, 심지어 관심 갖는 것조차 용서치 않는다.
그렇기에
신성함, 보이지 않는 진리, 거룩함에 대해
거부감, 두려움, 의심이 생긴다면,
오히려
내가 지금 무엇에 도취되어 있는가를 점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연기’를 자각하는 일의 시작은
내가 놓치고 있는 질문들을
다시 묻는 일에서 비롯된다.
‘신성한’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시도해봤으면 좋겠다.

